
폭풍우 치는 밤에
:: 직접적인 묘사는 없지만, 사망 관련 언급 有 ::
어느 비가 잔뜩 내리는 날이었다. 주변은 어두워서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고, 비도 세게 내리는 탓에 주변 소리가 제대로 들리지도 않았다. 이 상황에서 당장은 돌아가기 어려우리라 생각해 당장 몸을 피할 수 있을 만한 곳을 찾았다. 하나에는 겨우 들어간 골목(가게들의 지붕으로 비는 피할 수 있는)에는 자신만이 있으리라 생각했다. 여전히 앞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기에. 하지만 저벅거리는 발소리와 함께 작게나마 탄식이 들려왔다.
“혹시…. 거기 누구 계신가요?”
하며 물으니 상대도 예상하지 못했는지, 흠칫하는 기척이 느껴졌다.
“아…. 그래. 아무도 없으리라 생각하고 들어왔는데 아니었나 보군. 이 시간에 누군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어.”
“네, 저도요. 이 비…. 쉽게 그칠 것으로 보이진 않는데 그전까지 저랑 같이 대화나 하실래요?”
“좋지. 마침 할 일도 없었는데 말이야.”
방금 만난 사람이었지만 서로 얘기하고 있으니 점차 비가 그쳐가고 있었다. 날은 여전히 어두웠고, 나무판자가 가리고 있어 서로의 얼굴도 자세히 보지 못 했다. 이대로 헤어지기 아쉬웠는지 먼저 입을 연 건 하나에 쪽이었다.
“혹시 괜찮으면, 저희 다시 만나보지 않을래요? 그쪽은 어땠을지 모르겠지만, 저는 오늘 그쪽이랑 얘기하는 게 꽤 즐거웠거든요.”
“…그래, 좋지. 하지만 만나게 되면 서로인지 어떻게 알지?”
“암호를 정하는 거죠. 음…. ‘비가 오는 날, 골목에서’ 어때요? 딱 저희가 만난 상황이니까요!”
“그래. 그럼 그쪽 식당에서….”
다시 만날 약속을 정하고 남자와 여자는 서로의 거처로 돌아갔다. 끝내 말하지 않았던 건 서로의 신분. 한쪽은 경찰, 한쪽은 양이지사라니. 절대 만나서는 안 되는 조합이지 않은가. 하지만 서로는 서로의 신분을 모르는 채로 헤어졌고, 그렇게 밤은 저물었다.
약속한 날짜가 왔고 하나에는 약속한 장소에 도착했다. 도착해보니 그녀는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다. 약속한 장소에 서 있던 사람이 입고 있는 옷은 진선조 제복이 아니던가. 심지어 얼굴을 보아하니 ‘귀신 부장’으로 악명 자자한 히지카타 토시로 아니던가. 우연일 거라고 나름대로 합리화를 해보지만, 저 사람은 떠날 기미가 없어 보였다. 그래도 자신은 양이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도 않았을뿐더러 공개수배가 된 적도 없었으니 못 알아보리라 생각하고 아무렇지 않은 척 다가갔다.
“저기…. 혹시 비가 내리던 날…?”
“…골목에서.”
“아, 그분이 맞네요! 저는 아시카가 하나에라고 합니다. 그쪽은…?”
“히지카타 토시로다.”
하나에는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하려고 해보지만, 속에서는 쉬이 긴장이 풀리지 않았다. 혹시라도 알고 있지 않을까, 만약 여기서 내가 양이지사에 몸 담그고 있다는 걸 알게 된다면 난 어떻게 되는 걸까, 하는 불안함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하나에는 히지카타와 보내는 시간이 마치 가시방석 같았고, 즐겁게 보낼 수 없었다. 아무렇지 않게 행동하며 즐겁게 보내보자고 생각한 10분 전의 일이 무색하리만큼. 그는 정말 모르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알면서도 모르는 척 넘어가 주는 것일까.
진선조, 그것도 부장인 그가 그녀의 존재를 모를 리 만무했다. 사진상으로는 이미 한두 번 보았던 사람으로 꽤 인상 깊게 보았던 사람이다. 인상 깊었던 이유는 단 하나. 소위 말하는, 잘 사는 집안의 자제가 양이 활동이라니. 눈여겨볼 만하지 않겠는가. 지금 그 앞에 앉아있는 것은 그녀가 분명했다. 내게 그것을 숨기고자 하는 것인지 마음을 졸이고 있는 게 보였다. 제복을 입은 것이 실수였을까, 고민하던 것도 잠시. 양이지사에게 마음을 주겠다는 것도 아니고 이런 고민을 할 이유가 없다.
‘저 사람은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이렇게 시간 보내다가, 헤어질 때가 되면 나는 잡혀가는 것일까. 아니면 지금 당장에라도…? 날…, 아는 걸까…?’
‘저 여자는 나를 두려워하고 있겠군. 당장 오늘은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는 걸 알려줘야만…. 아니, 양이지사를 이렇게 놓친다? 그런 일은 용납할 수 없다. …그럼 당장 지금이라도 진선조로 데려가야만 하겠지. 그렇지만 신경이 쓰이는 이유는 무엇일지.’
서로만의 고민을 하며 어느덧 시간은 흘렀다. 계속해서 한 식당에 머물기만 하기도 신경 쓰이기에 일단 자리를 옮겼다. 두 사람은 어색한지 걷는 내내 말이 없었다. 서로 이 상황에서 동료에게 보이면 끝이라는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경찰과 범죄자의 조합이지 않은가. 히지카타의 마음을 알지 못하는 하나에는 당장에라도 잡혀가지 않을까 마음을 졸이며 걷고 있었고, 히지카타는 옆에 있는 그녀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는 마음에 마냥 편한 마음으로 걷고 있진 않았다.
서로 편한 마음은 아니더라도,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은 지금 상황이 만족스러웠다. 특히 그녀는 처음 만난 그날, 이야기하며 서로가 잘 맞는다는 생각이 들었기에 첫인상은 좋았다. 그때 좋아한다는 마음이 생기지는 않았겠지만, 지금은 마음이 흔들리고 있음을 느꼈다. 그 또한 그랬다. 서로의 정체를 알지 못했던 상태에서 느꼈던 감정이 너무 강했던 것일까. 아마 서로 감정을 알고 있진 못할 것이다. 얘기하지도, 그렇다고 티가 나지도 않았기에. 이런 마음을 가지고 계속 시간을 보내기도 이제 끝이다. 언제까지고 있을 수는 없으니까. 이제 돌아갈 때가 왔다는 것이다.
‘아마 다음에 만나면 적이겠지…. 앞으로 만날 일은 없을 거다.’
라고 두 사람은 생각하며 헤어졌다. 오늘은 운이 좋았다고 생각했다. 그녀도, 그도. 하나에는 히지카타가 자신을 잡아가지 않은 게 자신이 운이 좋았기 때문이라고 여겼다. 히지카타 또한 자신의 모습을 아무도 보지 못 한 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 하지만, 하나에는 거처로 돌아왔을 때, 그 생각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그곳으로 들어온 건 한 장의 사진이다. 사진을 누가 찍었는지 알 수 없었다. 찍혀있는 건 두 사람이 식당에 갔을 때의 모습이었다. 얼핏보면 마치 연인 같은, 연인이 아니더라도 사이좋아 보이는 장면이었다. 애석하게도 그들이 당시 어떤 생각을 했는지 모르는 동료들은 그녀를 비난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 또한 현재 자신의 처지가 당연함을 안다. 진선조는 적이니까. 그런데 본인이 진선조의 부장과 만난 것이니까. 그녀는 사람들이 자신을 첩자라고 생각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겼다. 그 사람들 사이에서
“다들 그만하게. 한 사람을 두고 여러 명이 비난하는 것이 어찌 옳은 일인가. 하지만 아시카가 씨, 당신도 알고 있겠지요? 이 사람들의 마음을 말이죠.”
하며 소동을 말린 사람이 있었다. 대충…. 그녀 무리의 대장으로 여겨지는 사람. 그는 다른 사람들을 말리며 한 가지를 제시했다.
“아시카가 씨, 저희의 신뢰를 다시 얻으실 한 가지 방법이 있는데 말이죠….”
“한 가지 방법이요…?”
“네. 사진으로 보아 당신이 오늘 만난 사람은 히지카타 토시로…. 진선조 부장이죠. 그 사람에게 접근해 정보를 빼 온 뒤, 저희에게 알리는 겁니다. 간단하죠? 그렇게만 하면 돼요. 우리의 신뢰를 다시 얻으실 수 있어요.”
“접근한 뒤 정보를 빼 온다…, 라고요…? 하지만 쉽게 정보 따위를 줄 리가…! 그리고 그 사람은 제 정체를 알고 있을 가능성이 커요!”
“정체를 안다면 왜 당신을 잡아가지 않았을까요? 그럼 그 사람이 당신을 좋아한다거나 그런 겁니까?”
“그건…!”
“방법은 이것밖에 없습니다. 이게 불가능하다면…, 알아서 처신하시지요. 그럼 전 이만….”
히지카타에게 접근해서 정보를 빼 오는 것이 그가 제안한 단 한 가지의 방법이다. 하지만 그런 것이 가능할 리 없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실제로 그는 그녀의 정체를 알고 있고, 양이지사가 아니더라도 쉽게 정보를 누출할 사람이 아니었기에. 많은 고민 끝에 하나에는 히지카타에게 연락을 넣었다.
‘혹시 2일 뒤에 오늘 봤던 곳에서…. 다시 볼 수 있을까요?’
그가 올지 안 올지는 모른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하는 것이 이틀 동안 그녀가 해야만 하는 것이겠지. 잠이 올 리가 없다. 오늘도, 내일도….
잔 것 같지도 않은 잠을 자길 2일. 벌써 당일이 왔다. 하나에의 기분을 나타내는 것처럼 그날은 비가 오고 있었다. 그녀는 먼저 약속장소로 나와 있었다. 비를 피할 우산도 가지고 있지 않은 채, 그렇다고 비를 피할 장소에 서 있던 것도 아니었다. 외에도 그 날과 다른 점이라면 그녀의 눈이 초점 없이 죽어있었다는 점이다. 히지카타는 그녀가 왜 불렀는지 전혀 알 턱이 없었다. 그런데도 부름에 응한 것은 그가 자신의 마음을 깨달은 것인지도 모른다.
“저기.”
“아, 오셨어요? 와주셔서 감사해요. 하고 싶은 말이 있었거든요.”
“하고 싶은 말이라면…?”
“바로 말씀드리자면, 저는 그날 당신과 있는 사진을 찍혔어요. 그리고 그걸 본 동료들에게 여러 소리를 들었지요. 아시죠? 제가…. 양이지사라는 걸 말이에요.”
“사진을? 언제? 네가 양이지사라는 건…. 알고 있었다만.”
“식장에 있을 때예요. 그래서…. 당신에게 접근해서 자료를 빼 오라고 하더군요. 그거 때문에 연락했어요. 나는 당신이 쉽게 말해줄 리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도전이나 해볼까 싶어서요. 하지만….”
“하지만?”
“나는 할 수 없어요…. 못하겠어요. 당신의 마음을 내가 알 수 없지만, 나는…. 나는 당신을 좋아하는걸요. 좋아하는 사람에게 첩자 짓을 할 수 없어요. 난…. 난 그래서 그들의 신뢰를 포기할 거에요. 그렇다고 해도 딱히 갈 곳은 없겠지만요. 저희 집안은 양이지사를 키우는 집안이 아니니까요. 오히려 쫓겨날 거예요. 그냥…. 이 말이 하고 싶었어요. 제가 당신을 좋아한다는 거요. 저를 보는 게 당신에게 좋은 일이 아닌 걸 알아요. 그러니, 이제 볼 일은 없을 거예요,”
“잠깐. 기다려라.”
“네? 왜….”
“... 아니. 아니다.”
그는 왠지 모를 불안함을 느꼈다. 그녀의 눈이 초점 없이 죽어있었기 때문일까, 내리는 비를 우산도 없이 맞고 있는 모습 때문일까. 그녀가 당장에라도 사라질 것만 같은 위태로움을 느꼈다. 그저 비가 오기 때문이라 생각하며 그는 이 불안함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갑자기 자신을 좋아한다는 고백과 동시에 이제 볼 일이 없다고 말한다. 별일 있지는 않겠지. 에도 내에 있다면 오다가다 마주치지 않겠나 싶어 중요치 않게 생각했다.
“할 말은 그게 다인가?”
“네. 혹시 하고 싶으신 말이 있을까요?”
“아니, 없다. 그럼 이만 나는 돌아가도록 하지.”
“네…. 그럼 안녕히 가세요.”
마지막에 그녀가 지은 건 어딘가 슬픈 웃음이었다. 해맑게 웃는 모습도, 옅게 미소를 지은 것도 아니었다. 히지카타는 그 웃음을 보고 위화감을 느꼈다. 하지만 다시 돌아봤을 때 그녀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마지막에 자신의 마음을 얘기해주는 것이 좋았을까 생각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녀는 이미 사라지고 없어진 뒤였다.
그가 둔영으로 돌아가고 난 뒤에는 웬 분홍 머리 여자아이가 있었다. 듣자 하니 자신은 아시카가 하나에의 친구이며 양이지사가 되겠다고 나간 그녀와는 연락은 지속해서 했다고 한다. 며칠 전 그 일이 있고 나서 그녀가 밤새 고민하더니 오늘 결판을 짓고 오겠다며 나갔다고 한다. 그리고는 돌아오질 않아 이쪽으로 오지 않았을까 생각해 일단 발이 움직이는 대로 왔다는 게 그녀의 이야기다.
“돌아오질 않아…? 어디 다른 곳에라도 간 것이 아닐까. 아니면, 놀러 갔다든지.”
“그래도 연락도 없는 게 너무 이상한걸요! 놀러 가셨다거나 어딘가를 가시면 늘 연락을 해주셨어요. 그리고 전화가 꺼져있는걸요. 이런 일은 없었는데….”
불안한 생각이 그의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설마 그녀가? 하는 생각에 카호코-분홍 머리 여자아이-에게 방금 있었던 상황을 이야기했다. 그녀가 스스로 죽음을 택했는지, 동료들한테 죽임을 당한 건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녀가 했던 말이 그의 머릿속을 맴돌았고 불길한 예상밖에 들지 않는다. 집안에 돌아가지도, 양이지사 거처에 돌아가지도 않았다. 그 어디에서도 그녀는 보이지 않았다. 만약 죽었다 한들 찾을 수 없을 것이다.
히지카타는 스스로가 어이가 없었다. 양이지사의 여자를 만났다. 그도 모자라 그 여자에게 좋아한다는 감정을 품었다. 그 여자가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열정적으로 그녀를 찾고자 하고 있다. ‘완전 할복감이군.’이라며 생각하지만, 그녀의 행방을 찾고 싶다는 생각 또한 강했다.
카호코와 협력하여 며칠간 히지카타는 하나에를 찾아보았다. 물론 그는 대놓고 찾을 수는 없었다. 대부분 카호코가 찾으러 뛰어다녔다. 하지만 그녀의 흔적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그녀의 생사도 모른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연연할 수는 없는 법. 그가 할 수 있는 건 언젠간 잊히겠지 생각하며 그는 오늘도 맡은 일을 해나갈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