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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조 왕자

국서의 화형집행일. 그날의 아침 하늘은 구름 한 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맑았다.
지하 감옥에서 밤새 쐐기풀로 겉옷을 뜨고 있던 옥정은 작은 창문으로 쏟아지는 볕이 눈부셔 눈을 찌푸렸다. 이제 조금만 더 뜨면, 11번째 옷이 완성된다. 제 목숨이 붙어있기만 한다면 오늘이야말로 분명 제 형제들은 백조에서 다시 사람의 모습으로 돌아올 수 있겠지만, 과연 제가 오늘을 넘길 수 있을까.

“당신.”

조금 뒤 처형장으로 가야하는 그를 찾아온 것은, 그의 아내이자 이 나라의 왕이었다.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옥정은 손은 계속해서 움직이면서 고개만 들어 제 아내를 바라보았다. 이름도 모르는 제 남편을 다정하게도 부른 왕은 더러운 바닥에 옷이 끌리는 것도 개의치 않고 무릎을 굽혀 옥정과 시선을 맞추었다.

“탈옥도 하지 않고 있다니. 정말 이대로 죽을 셈 인건 아니겠지?”
“…….”
“…하아, 말을 못 하는 건지 안하는 건지 모르겠군.”

답답하다는 듯 한숨을 푹 내쉬는 모양새가 곧 처형당할 자신보다 더 안쓰러워 보인다.
‘비렴.’ 한 번도 소리 내어 불러 본 적은 없지만, 참으로 아름다운 울림을 가진 이름이다.
옥정은 마음속으로 아내의 이름을 부르고, 굳은살로 거칠어진 손을 뻗었다.

“당신이 정말 나라를 기울게 할 정도의 주술사라면 이런 허술한 감옥을 탈출하는 건 어렵지도 않을 텐데.”

제 뺨을 쓰다듬는 손을 마주잡은 비렴은, 손가락 마디마디에 자리 잡은 상처들을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아니라고 한 마디만 하면, 그러면 되는데. 어째서 아무 말도 않는 건지.”
“…….”
“나는 당신을 믿어. 하지만, 나는 왕으로서 개인적인 고집은 부릴 수 없어. 대주교가 당신을 고발했으니 국민들의 의견과 나라를 위해 나는 당신을 처형해야 해. 당신이 항변하지 않는 이상, 그럴 수밖에 없어.”

그러니 제발 아니라고 해달라는 것인가. 옥정은 비렴이 왜 저런 말을 하는지 단번에 눈치 챘지만 당연하게도 침묵을 깨지는 않았다. 입을 열게 되면 모든 것이 끝나는 저주이기에, 제가 살기 위해서 제 형제들을 모조리 죽일 수는 없기에.

“폐하, 슬슬 시간이….”
“알고 있네. 재촉하지 말게.”

병사들의 독촉에 비렴은 아쉬워하며 일어선다. 끝까지 옥정의 손을 놓지 않는 그는 지금이라도 변론하라는 듯 제자리에 서서 움직이지 않았지만, 마주잡고 있던 손은 스르륵 빠져나가 뜨개바늘을 쥘 뿐이었다.

‘다정한 사람.’

옥정은 끝까지 자신을 믿어주는 왕을 떠올릴 때 마다 목 안쪽이 뜨거워졌지만, 결코 입술을 떼지 않고 마지막 옷을 완성하는 것에만 집중했다. 비록 쐐기풀을 뜯다 만난 인연이긴 해도, 만약 이런 상황만 아니었다면 평생 그와 함께 할 수 있었을 텐데. 제 처지가 만든 만남이, 제 처지로 인해 끊어진다. 참으로 애석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었다.

‘죄책감을 가지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비렴을 원망하지는 않는다. 왕의 책임은 무겁다는 걸, 왕자였던 자신은 잘 알고 있으니까. 다만 자신은 강인해 보여도 한없이 다정한 그가 제 죽음에 책임감을 가지진 않을까 두려울 뿐.
말 한마디 하지 않는 제게 그렇게 다정하게 대해준 것은 비렴뿐이었는데. 제가 쐐기옷을 뜨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고, 그저 별난 취미 정도로만 여기며 도움을 준 것도 그뿐인데. 오해를 사는 것은 두렵지 않으나, 따뜻한 말 한번 되돌려 주지 못하는 것이 이리 마음 아프다니.

“아, 저기 왔다!”
“이 이교도의 주술사 놈! 폐하를 꾀서 나라를 차지하려고 한 거지?!”

처형장으로 끌려가는 사이에도 백성들의 비난은 멈추지 않는다. 하지만 형제를 잃고 궁에서 쫓겨나 떠돌며 살아온 그에겐, 저 정도 폭언은 상처거리도 되지 않았다. 굳건한 표정으로 쐐기옷을 챙긴 그는 마무리만 남은 뜨개거리와 함께 장작더미 위로 올랐다.

“지금부터 형을 집행한다! 장작더미에 불을 붙여라!”

대주교의 명령에 병사들이 횃불을 들고 장작 가까이 다가간다. 이대로라면 분명 불타 죽을 텐데도, 옥정은 평온하게 뜨개질을 계속할 뿐이었다. 마치, 자신은 죽음이 두렵지 않다는 듯. 자신의 목숨보다도 옷을 뜨는 것이 중요하다는 듯, 굳건하고도 당당하게.

“어, 어어?”

불이 마른 장작에 붙으려던 그때, 맑은 하늘을 뒤덮으며 날아온 그림자가 횃불을 든 병사에게 덤벼든다.

“뭐, 뭐야 이 백조들은?!”
“아악! 아파! 뭐야 이 상황은?!”

횃불과 함께 물러선 병사들은 부리와 발톱으로 공격하는 백조 떼를 피해 도망가기 바쁘고, 처형을 구경하러 온 백성들은 뜻밖의 상황에 자기들끼리 떠들며 웅성거리고 있었다. ‘백조가 날아와 처형을 방해하다니.’ ‘이거, 국서가 결백하다는 증거 아냐?’ ‘주술을 부리고 있는 걸지도 모르잖아!’ 모두가 혼란에 빠진 사이. 이 모든 걸 보고 있던 비렴은 모두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처형을 중지시키려고 했지만, 그가 명령을 내리기도 전 상황은 또 한 번 크게 변하고 말았다.

“…아!”

화형 집행이 잠깐 방해받은 사이, 드디어 마지막 옷이 완성되었다. 옥정은 정말로 간만에 목소리를 내어 제 형제들을 불러 모은 후, 날아드는 그림자들에게 쐐기옷을 던져주었다.
한 명, 두 명, 세 명…. 쐐기풀로 만든 옷을 입은 백조들이 하나 둘씩 사람의 모습으로 변해, 옥정의 곁에 둘러선다.
11명의 형제들을 모두 인간의 모습으로 되돌린 옥정은 그제야 꾹 참아온 말을, 대주교를 향해 쏟아내었다.

“나는 이교도도 사교의 주술사도 아닙니다! 나는 옥정진인, 곤륜의 적법한 왕위계승자 중 하나이자, 12형제 중 5번째 왕자입니다!”

웅성웅성. 처음으로 입을 연 국서의 발언에 모두의 표정이 변한다. 출신 불명의 국서가 알고 보니 실종된 이웃 나라 왕자 중 하나였다니. 만약 화형이 진행되었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생각만 해도 아찔한 상황이 아닌가.
‘으아아.’ 끝까지 그를 모함하던 대주교는 얼빠진 소리를 내뱉더니, 다리의 힘이 풀려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당신!”

높은 곳에 앉아있던 비렴은 다급히 아래로 뛰어내려와 옥정에게 달려간다.
‘비렴.’ 작게 속삭이듯 아내의 이름을 처음으로 불러본 그는 가까워져 오는 사랑스러운 얼굴을 바라보다가 두 팔을 벌려 상대를 안아주었다.

“믿어줘서 고마워, 비렴. 고마워. 옛날부터 쭉. 고맙다고, 말하고 싶었어.”

아아. 그토록 듣고 싶었던 그의 목소리는 다정하고 아름다웠다.
‘옥정.’ 힘들게 알아낸 상대의 이름을 불러본 비렴은, 믿음으로 지켜낸 자신의 남편의 뺨에 몇 번이고 입을 맞춰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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