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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공녀

* 삼국지톡 무료분의 내용이 일부 포함되어 있습니다.

* AU라기보다는 드림주 원선 字 혜란의 서사 전반을 소공녀에 빗대어 표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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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씨가문의 천한 얼녀.

 

 그것이 원선이었다. 저 밖의 종들조차 시시껄렁하게 입에 담을 수 있는 유일무이한 원씨가문의 자제. 그들은 구태여 그녀를 향한 노골적인 비웃음을 거두지 않았다. 그것은 그녀의 손으로는 씻을 수 없는 아비의 과오였고, 그녀의 원죄였다.

 

 세상에 태어나는 게 죄라는 법이 어디 있단 말인가.

 

 적어도 내가 사내였다면. 원선은 제 사촌 오라비의 태생을 알았다. 아니, 이 집안 식구들 가운데 그것을 모르는 자가 어디 있을까. 그들은 그의 신분을 감히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그와 비슷한 핏줄을 갖고 태어난 그녀조차도 말할 수 없는 단어였다. 원본초, 이 나라를 바로 세울 프린스.

 

 원선은 자세를 바로잡았다. 이제 와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무엇을 거역할 수 있겠는가. 제 아비의 다정스런 손길에 취해있던 나의 잘못이겠지. 그날, 그 어린 날, 당신께서는 왜 나의 뺨을 감싸 안고 볼에 입을 맞추셨을까. 그리도 본초 오라버니를 경멸하는 어르신께서, 내 어디가 예쁘시다고.

 

 그러나 그녀는, 세상의 그 누구보다도 제 아비의 사랑을 자각하고 있었다. 저를 내려다보는 그 시선에 담긴 온기를 모를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는 그리도 그의 어린 딸을 아끼고 사랑하면서, 아버지라는 단어 하나를 그녀의 품에 안겨주지 않았다.

 

 "아가씨, 어르신께서 부르십니다."

 

 그러니 나에게는 머리조차 조아리지 않지.

 

 저를 똑바로 노려보는 그 시선이 싫어, 구태여 그들이 섬기는 자의 흉내를 낸 적이 있었다. 부질없는 짓이지. 태어나기를 다르게 태어났는데, 제 행동거지 하나로 대우가 달라질 리 없었다.

 

 원선은 저를 안내하는 하인의 뒤를 따랐다. 가벼운 몸짓, 올곧지 못한 발걸음. 그녀는 그것이 제 어미를 닮았다는 소리를 들었다. 어떻게, 도대체 어떻게 하면 섬기는 자에게 이런 소리를 듣게 하는 거지.

 

 그리고, 그 말을 전해 들은 어르신의 태도는 또 무엇이고.

 

 원선은 깊게 생각하지 않으려 애썼다. 어르신이 제 어미를 그리워하든, 원망하든 무슨 상관인가. 날 버리고 떠난 사람이었다. 제 행복을, 자유를 위하여 저만을 여기 두고 떠난 비정한 어미.

 

 그녀는 영영 제 어미를 이해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마침내 어르신의 방문 앞에 다다랐을 때, 문고리를 잡는 하인의 손이 떨리었다. 오랫동안 저택에 고용된 사용인이 분명한데, 어떤 연유로 이런 추태를 부리는 거지. 원선은 묻지 않았다. 사실,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녀의 구둣발 소리가 방안에 울려 퍼지자, 어르신이 고개를 들었다. 언제나처럼 단아하고 우아한 표정, 기품 어린 몸짓... 평소와 다른 말투.

 

 "내 너에게 청이 하나 있다."

 

 원선은 고개를 들었다. 어지간한 일로 그녀를 부려먹을 어르신이 아니었다. 아니, 애초에 그녀에게 이렇게 따로 부탁한 경우가 있던가. 원선이 한 걸음 더 나아갔을 때, 그는 그녀를 향해 종이뭉치를 건네었다.

 

 "이걸 공로에게 전해주거라."

 "뭐, 간단한 일이네요. 중요한 건가 봐요?"

 

 원선은 스스럼없이 종이를 받아들였고, 그의 미소에 담긴 그리움을 읽었다. 이렇게 감정을 드러내는 어르신이라니. 그녀는 부러 티를 내지는 않았지만, 모든 것이 어그러졌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무슨 일인가가 벌어지고 있는데, 할 수 있는 일이 이리도 없다니. 원선은 고개를 돌렸다. 이제 밖으로 나갈 시간이었다. 그가 자신을 부르지만 않았다면, 그녀는 충분히 그리 행동했을 것이다.

 

 "딸아."

 

 하지만, 대답할 수 없었다.

 

 "선아."

 "어르신, 명령은 따르겠습니다."

 

 대답할 수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잖아요. 무슨 일을 앞두고 당신이 이렇게 나를 애절하게 부르는지, 미천한 나로서는 알 수가 없어. 그녀는 힐끔거리며 어르신을 바라보았고, 그의 얼굴이 일그러진 미소를 띠는 것을 발견했다.

 

 뒤돌아선 발걸음이 무겁다. 평소처럼 당당히 앞문을 향해 걸어가려 했건만, 그녀를 안내하는 하인이 후원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군소리 없이 따라가고 있기는 하지만, 그렇지만.

 

 무언가, 무언가가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다. 후문 쪽으로 그녀를 안내하는 하인의 발걸음이 점점 재빨라지고, 어디에선가 비릿한 냄새가 스멀스멀 기어들어 왔다. 그리고 들려오는 마찰음과 고함. 제자리에 멈추어 서려던 원선의 손을 잡아채고, 하인은 달리기 시작했다.

 

 원선이 저택에서 벗어나고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불길이 치솟았다. 그녀는 오랫동안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였고, 제 사촌 오라비의 자가용이 제 옆을 지나가고 나서야 달릴 수 있었다.

 

 나를 원 씨로 죽지도 못하게 하다니.

 

 모든 걸 이렇게 한순간에 잃게 하다니.

 

 그녀의 울부짖음은, 제 사촌 오라비의 손에 저지당했다. 그 자신조차도 눈물을 흘리고 있는 주제에, 부하들의 손에 억지로 차에 태워지는 주제에, 그는 그녀에게 손을 뻗었다.

 

 "원혜란, 품위를 지켜!"

 "종놈의 자식이 무슨 놈의,"

 "네 아버님의 유언이시다. 네가 똑바로 봐. 그분이 누구를 선택하였는지, 네 그 눈으로 똑똑히 보란 말이다!"

 

 원선은 그에게서 받았던 문서를 그제야 펼쳐 보았다. 기껏 몇 자가 수정된, 그들 가문의 가계가 분명했다. 오직 한 사람만이 수정된.

 

 원외 字 차양의 적녀, 원선 字 혜란.

 

 그녀는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원 씨로 죽지 못하게 한 것이 아니라, 원 씨로 살아가게 해준 것이었다. 그런데 나는 끝까지 당신을... 어르신이라고 불렀어.

 

기껏 종이 쪼가리 하나였으나, 원공로는 그것을 무시할 수 없었다. 선대 가주의 마지막 유언이었다. 자신과 그녀를 대등한 신분으로 인정하라는, 엄숙한 명령이었다. 그녀는 이제 원씨가문의 정통한 후계자였으므로.

 

 제 아비의 죽음은 비참했고, 장례식은 그야말로 난장판이었다. 저와 피를 나눈 자들의 역겨운 행위를 지켜보다가, 그녀는 그 자리를 피해버리고 말았다.

 

 아비를 잃은 가여운 소공녀. 비록 자신은 아비의 죽음과 동시에 귀히 여겨졌지만, 결국 엔딩은 같지 않은가. 어린 시절의 동화 같은 삶을 내가 누릴 줄이야. 원선은 헛웃음을 지었다. 단 한 번도 이런 대접을 기대한 적이 없었다. 나는, 나는 당신을... 살아있을 때 아버지라고 불러주고 싶었어.

 

 그것마저 허락되지 않는 동화 속 삶이라니. 기가 막힐 지경이었다.

 

 "선아."

 "돈돈아!"

 

 원선의 구김살이 조금이나마 미소를 띠었다. 그 두텁고 커다란 손길이 제 어깨에 닿았을 때, 그녀는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언제나 제 어깨를 내게 내어주는 당신. 나의 오랜 친구.

 

 "소공녀 이야기 기억해?"

 

 그녀는 하후돈과 함께 구석진 자리로 향했다. 다툼 소리가 저와 멀어짐에 따라, 원선의 얼굴은 다시금 생기를 찾아내었다.

 

 "그래, 너 그 동화 좋아했잖아."

 "내용을 좋아한 건 아니야. 그냥... 너도 알잖아."

 "그래. 너희 아버지께서 처음으로 읽어주셨던 동화였다며."

 

 하후돈은 저보다도 몇 뼘이나 작은 그녀의 뺨에 손을 갖다 대었다. 붉게 상기된 볼이 어째서인지 서늘하다. 원하던 것을 이제야 얻었건만, 모든 것을 잃은 나의 가엾은 친우. 나의 작은 맹우. 그는 그녀가 속삭이는 말을 흘려듣지 않았다.

 

 "어르신, 아니 아버지께서 내가 그런 삶을 살기를 바라셨을 줄은 몰랐어."

 "글쎄. 아닌 것 같은데."

 

 원선이 눈을 샐쭉하게 뜨고 자신을 노려보자, 하후돈은 너털웃음을 지었다.

 

 "너희 아버지께서 정말 그러셨을까?"

 

 잘 생각해봐. 그분이 잠시나마 본초 어르신께 가문의 운명을 맡겼던 까닭을.

 

 하후돈은 그녀에게 제 손을 내밀었다. 원선이 머뭇거리더라도, 그는 기꺼이 그녀를 기다려줄 수 있었다. 이미 몇십 년을 기다려온 외사랑이었다. 그러니 몇 번이고 다시 당신에게, 내 손을 내어줄 거야. 하후돈의 입가에는 강한 신뢰감이 번지고 있었다.

 

 "그리고 네가 택할 주군을."

 

 먼발치에서 그녀를 향한 시선이 느껴졌다. 그녀의 친우인 하후돈의 친척 형이기도 했지만, 그녀가 어린 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오라버니에 더 가까운 사람이었다. 그는 아무 조건 없이 제 아명을 그녀에게 허락했었다. 한나라의 충신이자, 능신. 그리고... 난세의 영웅이 될 법한 당신.

 

 그녀는 그가 내민 손을 바라보았다. 학창 시절, 제 스승을 욕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주저 없이 사람을 죽인 남자였다. 그리고, 그가 저를 욕한 자 또한 그와 같은 꼴로 만들어 주리라는 것을 잘 알았다. 그들은 제 가족이었다. 그들도 저를 가족이라고 여긴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단지 원선이 대명문가 원씨가문의 자제이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저 자신들과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 낭심 친구를 그 자격에 걸맞게, 합당하게 대우해주는 것뿐이었다. 신분이나 지위, 그런 것을 막론하고 단지 함께 보낸 추억 때문에.

 

 그 손을 잡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녀는 어쩌면 다시 천한 신분으로 전락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의 손을 잡은 지금, 이 순간 그녀는 자신을 자각할 수 있었다. 자신은 그저 아비를 잃은 귀하디 귀한 소공녀가 아니었다. 왕실에서 곱게 피어난 작은 꽃 따위는 될 수 없었다. 그녀는 원씨가문의 자제였다. 제 아비가 제게 만들어준 마지막 지위는 그녀의 안녕을 위한 것이었다. 그녀의 곧게 필 성장을 위한 것이었다. 현실에 안주하다니. 그녀의 오라비들을 보라. 누구보다도 이름을 널리 떨치고 있는 그들에게 뒤처지는 것, 그것이 아버지가 바라던 것인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제 욕망의 크기를 어찌 모르셨겠는가.

 

 원씨가문의 저택을 떠나더라도, 그녀는 결국 원 씨일 수밖에 없음을 이제서야 알게 된 것이다.

 

 하후돈은 그녀를 잘 알고 있었다. 대저택의 공주님 취급을 바라는 귀한 집 여식을 제가 사랑했겠는가. 그녀는 전장에서 피어날 꽃이었다. 제가 평생을 섬길 또 한 명의 주군이었다. 제 사랑은 언제나 그녀를 위한 것이었다. 비록 자신의 육신은 그녀의 곁에 머무르지 않더라도, 제 모든 감정은 여기에 남아있을 것이 분명했다. 하후돈은 원선의 머리맡에 입을 맞추며, 그녀에게 닿지 않을 말을 중얼거렸다.

 

 전장에서 다시 만나자, 나의 소공녀.

 

 나의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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