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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구두

● 약간 잔혹동화 느낌 있습니다.
● 모브캐 시점입니다.

그에게 사랑은 어떤 것일까? 여러분은 사랑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있는가? 모른다 해도 부끄러운 게 아니다. 사실 사랑은 어떤 거라고 말하는 게 더 어려울 테니. 왜 갑자기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지 눈치 빠른 그대들은 알아챘겠지. 그래. 이건 사랑을 모르는 어린애가 얼마나 위험한 일을 할 수 있는지 알려주기 위해 한 말이다.
비바람을 피하려 여관에 들어오니 주인이 먼저 나보다 먼저 온 손님을 받고 있었다.  
“다리는 좀 어때요?”
“늘 그렇죠, 뭐.”
주인은 손님 중 하나가 익숙한지 안부를 물었다. 안부 인사를 받은 이는 양 다리가 의족이었다. 그 옆에 서 있는 사람은 그를 걱정하고 있는지 얼굴에 수심이 잠시 비쳤다. 그들은 체크인을 하려다 문득 나를 보고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많이 기다리셨나요?”
“괜찮습니다. 그나저나 비를 많이 맞으셨군요.”
“비바람이 이렇게 많이 불 줄 몰랐거든요. 게다가 그 쪽도 마찬가지인걸요.”
의족을 한 이가 내게 그렇게 말했다. 이런. 그 정도로 몰골이 형편없었나. 그 생각을 하고 거울을 보고 있자니 그이가 키득키득 웃었다. 그런 그를 보고 옆에 있던 이가 말을 걸었다.
“저희 수속은 끝났습니다.”
“고맙습니다.”
“산옥, 우리는 들어갈까요?”  
“네.”
의족을 한 그는 이름이 산옥인 모양이었다. 산옥은 느리게 계단을 올라갔고, 일행이 그 뒤를 따르고 있었다. 그들이 시야에서 멀어지고 나야 나는 수속을 했다.
“단골손님이신가 봐요?”
내가 주인에게 물으니 그는 이렇게 답했다.
“그렇기도 하고, 원체 유명한 사람이기도 하고.”
“명문가 자제인가요?”
“어머, 빨간 구두 이야기를 모르세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일개 이방인인 내가 그들을 어떻게 알겠는가. 여관 주인은 내가 이방인이라는 걸 알아챘는지 수속을 마친 뒤에 작게 속삭였다.
“천벌 받은 거예요. 천벌.”
“천벌이오?”
“자기한테 그렇게 다 해 준 사람을 끝까지 지키지 못했으니 천벌받은 거예요. 그러지 않고야 저렇게 다리를 둘 다 잃을 수 있겠어요? 인간이 그럼 안 되지.”
대체 산옥에게 무슨 사연이 있는 것일까. 그리고 다리를 전부 잃었음에도 그 곁을 지키고 있는 이에게는 또 어떤 사연이 있는가. 주인은 그들이 방으로 가는 걸 보고 내게 빨간 구두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산옥은 오래 전부터 할머니와 함께 살던 이였다. 그는 자신보다 더 빨간 구두를 사랑했는데, 그 구두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시시때때로 신고 다녔다. 간단히 장을 보러 갈 때도, 친구를 만나러 갈 때도, 심지어 교회를 갈 때도 신고 다녔다. 제일 문제가 됐던 건 할머니 장례식장에 빨간 구두를 신은 일이었다고 한다. 그로 인해 벌을 받아 두 다리를 잃었는데, 산옥 옆에 있던 그이가 이전부터 마음에 두고 있던 산옥을 제게 묶어두기 위해 원치 않는 그를 알면서도 다리를 잃게 만들었다는 이야기였다. 잔인한 이야기에 절로 헛구역질이 날 것 같으면서도 묘한 기분이 들었다. 사랑하는 이를 묶어두기 위해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어떨까. 나는 호기심이 들었다.
내가 짐을 풀고, 샤워까지 마치고 나니 응접실에 그들이 있었다.
“씻고 오신 거예요?”
산옥이 내게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물었다.
“다리가 불편하실 텐데 여기까지 오는 것도 힘들지 않으셨나요?”
“팔계 씨가 있어서 그렇게까지 힘들지는 않았어요.”
팔계라고 하는구나. 우리는 서로 통성명을 했다. 나는 왕실에서 파견되어 영지를 관리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꺼냈고, 산옥이 물었다.
“그럼 이 마을을 관리하시는 건가요?”
“일단 예정으로는 그렇습니다.”
“굉장하네요. 높으신 분하고 이야기를 나누게 됐네.”
“딱히 그렇지도 않습니다.”
산옥은 다리를 잃은 사람이라고 느껴지지 않을 만큼 밝고 기운찬 사람이었다. 팔계는 산옥을 향해 웃고 있었으나 딱히 말을 많이 하는 편이 아닌지 우리가 하는 이야기를 듣고만 있었다. 얼마 되지 않아 그가 입을 열었다.
“저희는 곧 이주할 생각이에요.”
“이주요?”
“네. 짐 정리가 다 안 돼서 며칠 동안은 숙박 시설을 이용하고 있어요.”
“왜 그런 번거로운 일을.”
“말 그대로 짐이 좀 많거든요. 이것저것 챙길 게 많아서. 이제 얼추 다 됐으니까요.”
산옥이 이야기에 끼어들었다. 팔계는 그런 그를 알면서도 말리는 기색은 없었다. 둘이 무슨 사이이든 간에 긴밀한 관계로 보였다. 나는 팔계에게 물었다.
“당신은 어째서 산옥과 함께 있는 건가요?”
“무슨 말씀이신지.”
“주인장에게 산옥 이야기는 대강 들었어요. 하지만 당신 이야기는 듣지 못했거든요. 산옥이 다리를 얻었으니 당신이 할 역할은 이대로 끝난 게 아닌지 해서.”
무례한 말인 줄 알고 있었으나 묻지 않을 수 없었다. 팔계는 내 말을 듣고 멀거니 있더니 대답했다.
“말하자면 책임감 같은 거라고 할 수 있겠죠. 혹은 죄책감이라든지.”
“죄책감?”
“팔계 씨, 그런 것들은 더 느끼지 않아도 된다니까.”
산옥은 팔계를 만류하고 나를 보더니 입을 열었다.
“저희를 두고 어디까지 이야기를 들으셨는지 모르겠으나, 저희는 단 한 번도 남들이 조롱할 만한 관계였던 적은 없어요.”
꽤 진지한 목소리에 나도 귀를 기울였다. 산옥이 들려준 이야기는 조금 의외였다. 아니, 아까 들은 이야기보다 훨씬 현실감 있다고 하는 편이 옳을 것 같았다.
팔계가 산옥을 향해 연정을 가진 건 맞았다. 그가 어린 시절부터 알고 있던 산옥은 굉장히 밝은 사람이었고 그 점이 팔계를 잡아끌었다. 그 탓에 산옥도 팔계가 자신을 얼마나 좋아했는지 알고 있었고, 실제로 만난 적도 있다고 했다. 그렇지만 산옥을 키워 준 할머니가 팔계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아 몰래 만나며 인연을 키워 왔다. 그러던 중, 산옥에게 벌이 내려지고 산옥은 팔계를 찾아와 자신이 가진 다리를 앗아가 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당신이 직접 그렇게 말했다고요?”
“그 편이 나아 보였거든요. 팔계 씨 입장에선 힘든 일이었겠지만, 저로서는 그랬어요. 제 옆에 가장 가까이에 있을 사람이 팔계 씨일지도 모른다는 막연함이 그런 부탁을 하게 만들었네요.”
“하아.”
“그래서 팔계, 당신은 죄책감이라는 표현을 썼군요.”
“제가 겪은 상황을 생각하면 누구든 그런 생각을 할 거라고 생각해요.”
“하긴 그렇겠군요.”
“아하하. 지금 생각해 봤는데 참 무모하고도 자비가 없는 말이었네요.”
“하지만 산옥이 그런 제안을 제게 했다는 건 차라리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어요. 만약 아무것도 모르고 당신이 다리를 잃은 사실을 알았다면 그것은 그것 나름대로 충격일 듯 하거든요.”
하긴 사랑하는 사람이 끔찍한 일을 겪어도 몰랐다면 그건 그것 나름대로 죄책감이었겠지. 나는 이야기를 듣다 문득 의문이 생겼다.
“그 이유 외에 팔계가 산옥을 끝까지 살펴야 할 이유는 있나요?”
“네?”
“그런 이야기는 듣지 못했는데.”
산옥은 내 이야기에 흥미가 도는 얼굴로 팔계를 보았다. 죄책감 외에 이러한 결정을 하게 된 계기가 있다면 좋겠다고 바라는지도 몰랐다. 팔계는 우리를 번갈아 보더니 멋쩍게 웃었다.
“뭐, 그것만은 아니지만.”
“그러면 다른 이유가 있는 거군요?”
“굳이 대답하고 싶지는 않아요. 여기서는.”
여기서는, 이라. 부끄러운 모양이지. 많은 이야기를 듣지는 않았지만 팔계가 산옥 손을 놓지 않고 있는 모습을 보니 대략 어떤 느낌인지 알 것 같았다. 나는 슬쩍 웃었다.   
“이야기 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느님께서 당신들을 행복한 길로 이끄시기를. 저는 이만 자러 가겠습니다.”
“좋은 꿈꾸세요.”
그들과 나는 인사를 나누고 각자 방으로 흩어졌다. 자고 일어나 방을 나서니 쪽지 하나가 문에 붙어 있었다. 쪽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마을 사람들을 잘 부탁드립니다. - 빨간 구두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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